2026. 01.06
<선감학원>
한 달간 이어진 경기창작센터 단체전을 철수했다.
작품을 내리고 공간을 비우는 일은 익숙하지만, 이곳에서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 선감학원이 있던 곳이다.
힘없고 가난한 아이들을 섬에 가두고, 보호와 교화라는 명목 아래 강제 노동과 폭력과 죽음 속에 놓였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들은 땅속에 묻혔다.
암매장지로 알려진 곳을 찾아 초코파이와 딸기우유를 놓고 잠시 추모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평범했을, 어쩌면 허락되지 않았을 사소한 것들이다.
과거의 비극이 남아 있는 자리 위에서 작품을 보여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철수했다.
예술이 그 시간을 대신 덮거나 말해주기엔 부족하다.
다만 이 공간은 처음부터 중립적인 장소가 아니었고, 보이지 않게 남아 있는 기억 위에 우리가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초코파이랑 우유를 놓고 뒤돌아서는데 잠시 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바람에 날린 가벼운 깃털이 아닌, 새의 깃 뼈가 있는 깃이 한참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냥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딱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
2026. 02.26
단종 어진 영인본
<왕과 잠시 함께 했던 남자>
2020년 가을, 동강 권오창 선생님께서 완성하신 <국가표준영정 100호〉 단종 어진의 영인본 작업을 맡게 됐다. 그해 11월, 영인 촬영과 출력을 하던 그날이 아직도 선하다.
같은 해 4월, 봄볕이 따스하던 날에는 단종 어진 이봉 반차도(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렬을 담은 그림) 영인본 작업도 함께했다.
원화는 지금 수장고 깊이 잠들어 있고, 영인본은 단종역사관에 전시돼 오늘도 많은 이들과 마주하고 있다.
영인본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 나는 늘 그 사람의 삶부터 들여다보게 된다. 단종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다만 그 어진을 마주하고 있으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무게가 가슴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아 먹먹하다.
요즘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연일 흥행가도를 걷고 있다.
나도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극장을 나와서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순왕후께서 돌아가신 지 500년이 넘었다. 이제는 단종 곁에 모시는 것이 어떨까. '
영월 장릉과 남양주 사릉.
살아서도 갈라졌던 두 사람이 죽어서도 수백 리 떨어져 있다. 그 거리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유독 더 멀게 느껴졌다.
나는 왕과 사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500여 년 지난 후 왕과 잠시 함께 했던 남자였다.
2026.03.12
삼겹살을 먹다 문득 생각난다.
어떻게 먹고 살다 이 불판에 올랐을까.
불고기를 먹다 문득 생각난다.
어떤 들판에서 살다 냄비에 들어갔을까.
생선을 뒤집다 문득 생각난다.
어느 바다를 누비다 여기까지 왔을까.
누군가의 생이 끝난 자리에서 우리는 산다.
희생 없는 생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6. 04.21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
이건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수십 년을 살아오며 몸으로 익힌 나만의 법칙이다.
남들이 한 번 두드리면 열리는 문이, 나는 열 번을 두드려도 꿈쩍하지 않는다.
스무 번을 두드리면 그제야 조금 열리는가 싶다가도, 닫힌다.
그것도 손가락이 끼인 채로.
돌이켜보면 내 삶은 늘 그랬다.
분명히 충분히 했다.
아니, 충분히보다 더 했다.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했고, 지쳐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날에도 했다.
그런데 결과는 언제나 야속했다.
100을 쏟아부어도 손에 쥐어지는 건 고작 30.
나머지 70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누가 가져간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내 몫이 아니었던 걸까.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운이 70이고 실력이 30이라는 뜻이다.
그 말이 위로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
실력이 부족해도 운이 따르면 된다는 희망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그 공식은 처음부터 뒤집혀 있었다.
운삼기칠(運三技七).
내가 아무리 실력을 갈고닦아도, 운명은 늘 내 편이 아닌 자리에 서 있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비껴갔고, 결정적인 타이밍마다 등을 돌렸다.
운이라는 것이 나를 선택적으로 외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엔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더 노력하면 되겠지.
더 준비하면 되겠지.
부족한 운을 실력으로 채우면 되겠지.
그래서 더 했다.
더 오래, 더 깊이, 더 악착같이.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건 내가 더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무리 빠르게 달려봤자, 결국 더 많이 미끄러질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지쳤다.
열심히 살아서 지쳤다는 말이 이렇게 슬픈 문장인 줄 몰랐다.
게을러서 지친 것도 아니고, 포기해서 지친 것도 아니다.
끝까지 붙들고, 끝까지 믿고, 끝까지 해보려 했기 때문에 지친 것이다.
그 성실함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고, 동시에 나를 이렇게 텅 비게 만들었다.
노력이라는 연료를 너무 오래, 너무 많이 태웠더니 이제는 바닥이 드러난다.
남들 눈엔 그냥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이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비범하게 버텨왔는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력들이, 인정받지 못한 시간들이, 조용히 쌓이고 쌓여 지금의 이 무게가 되었다.
지쳤다는 건 포기가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위안되는 것은 스튜디오 근처가 숲이 많아 한 참을 걸을 수 있었다.
2026. 04.27
맞습니다.
바위입니다.
당신이 지금 인식한 것처럼 둥그런 바위입니다.
그러나 바위가 아닙니다.
스티로폼입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바위입니다.
진실이 인식을 바꿀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어온 것은 진실 앞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2026. 06.20
물은 도화지가 되었다.
돌은 붓이 되었다.
물감은 필요 없었다.
2026. 06.25
수없이 쓰여진 책, 수없이 그려진 그림, 수없이 연주된 음악.
그것들은 몇몇에게만 읽히고, 보이고, 들린다.
그리고 그 종착지는 어느 폐지 공장, 어느 폐기물 봉투, 어느 컴퓨터 휴지통이다.
기억 속에 있었던 것조차 결국 버려지고,
기억 속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진짜 소멸이 된다.
그렇게 깔대기에서 걸러지고 걸러진 것만이
우리에게 읽히고, 보이고, 들린다.
‘남의 일이 아니다.
2026. 07.28
<이거 너무한거 아니냐?>
인공지능이 기술과 정보를 독점하기 시작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심해진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가속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소득 격차가 아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필요했던 것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예전엔 어떤 것에 집중하고 노력하는 것이 성취의 조건이었다면, 지금은 무엇에 얼마나 투자하느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겉으로 인공지능은 대단히 민주적인 도구처럼 보인다.
몇 년의 숙련이 필요했던 일을 며칠 만에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엔 또 다른 문턱이 세워지고 있다.
가장 강력한 인공지능과 가장 정제된 데이터는 결코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그것을 소유한 소수의 자본이 그 위에 새로운 권력을 쌓아 올릴 뿐이다.
노력이 무의미해진 게 아니라, 노력이 향하는 자리가 바뀐 것이다.
예전엔 기술을 익히는 시간 자체가 경쟁력이었다면, 지금은 그 기술을 대신 수행해주는 인공지능에 누가 먼저,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느냐가 경쟁력이 된다. 이 접근권이 시장 논리로만 배분되는 한, 뒤처진 이들은 노력만으로는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정보 독점의 실체다.
그래서 이제는 인공지능과 그것이 다루는 정보를 공공재로 다뤄야 한다는 논의가 필요하다. 전기와 수도가 한때 소수 자본가의 사업이었다가 공공의 기반이 되었듯,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지식과 접근성도 사회 전체가 나눠 가져야 할 자산으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늦추자는 말이 아니다. 그 발전이 만든 격차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기술 자체의 속도만큼 빠르게 마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가질 수 있는가"다
2026. 08.07
<지렁이>
후라이팬처럼 달궈진 바닥.
1미터만 가면 안전지대인 하수구였는데,
애꿎게 죽어 나간 지렁이.
왜 나왔을까?
갈매기 무리에도 조나단 리빙스턴이 있듯,
지렁이의 세계에도 본능을 넘어 무언가를 사유하는 존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