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3.29
<우리집 흰둥이>
엄마가 마당에서 기르는 시고르자브종이다.
7년이 됐다.
처음 왔을 때 속눈썹도 길고 눈빛도 선했다.
별 탈 없이 잘 크던 것이 2주 전부터 숨소리도 거칠고 잘 먹지도 않는다.
배엔 가스가 찬 듯 불록하다.
병원 가는 길 창밖 풍경이 낯선 듯 구경한다.
검사해 보니 가스가 아니라 복수가 찬 것이다.
치료 시기를 놓쳤다 한다.
지금 시기에 치료해도 위험하다 하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
길어야 한 달 정도라 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닭 가슴살, 통조림 몇 개 챙겨 주었다.
집에 오는 내내 나를 힐끔힐끔 보더니 한참을 빤히 쳐다본다.
말은 못 알아 들어도 눈치는 있을 것이다.
동네 어르신이 오시더니 옛날엔 개가 아프면 작약과 북어를 끓여 먹이면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하니 엄마는 조만간 작약과 북어를 구해 먹여 보신다 한다.
엄마에게 한 달 정도 살 거라고 하니,
녀석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시는 말씀이 "에휴~ 불쌍한 것, 한 달씩이나! 힘들어 어찌 사니...”
원망스러운 애정 어린 애틋한 말이다.
다음 주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21. 04.13
<내가 조선의 프라이팬이다.>
엄마가 시집와 얼마 후 샀다는 무쇠로 만든 소당이다.
유추해 보면 어림잡아 50여 년은 됐을 것이다.
더 이상 환영받지 않아 창고 한편에 덩그러니 처박혀 있던 것을 끄집어내어 녹 벗기고 찌든 기름때 닦아 냈다.
무쇠 팬 둘레는 사포로 문지르고 문질러 부드럽게 마감하고,
사용감과 건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역시 창고 기둥에 걸려있던 용도를 알 수 없던
고리를 손잡이에 끼워 넣었다.
이 고리 또한 수십 년은 된 물건이다.
물건이든 장소든 사람이든.
그곳에서, 그것에서, 그에게서 나눌 사유와 소담스러움이 없다면 그냥 외피일 뿐이다.
사랑이 있으려면 애착 있어야 하고, 그 애착은 대상에 대해 각별( 各別) 함으로 다가간다.
타자에겐 무의미한 객체가 어떤 이에게는 특별함으로 자릴 잡는 김춘식 시인의 '꽃'처럼 말이다.
너무 싸고 흔한 세상이다.
다이소에 가면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수많은 물건이 즐비하다.
그렇게 쓰고 버리고 다시 사는 소비의 세상이다.
생산자는 물건값이 싸니, 이윤이 적어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소비자는 사고 버림의 반복 속 지출 속에 끊임없이 돈벌이 내몰리며,
당연함을 가장한 모순된 세상에 마취돼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다.
그런 면에서 돈으로만 살 수 없는 사유 베인 물건을 몇 개 가지고 쓰고 있는지 둘러봐야 할 시간이다.
낡음은 허름함일 수 있으나 역사일 것이고,
묵은 때는 더러움 일 수 있으나 아닌 추억일 것이다.
"휘슬러 프라이팬에 없는 내 역사와 내 추억이 베인 조선의 명품 프라이팬이 생겼다."
"내가 조선의 프라이팬이다."
2021. 08.04
왜 한 번도 웜홀 같은 지름길이 없었는가.
늘 무엇을 해도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야 했는가. 어깨가 구겨질 듯 무거운 것들까지 짊어지고.
남은 연골은 얼마나 남았을까?